“자신의 재산을 규제할 지혜롭고 세심한 집단을 찾고, 그 집단을 입법기관의 구성원으로 선택하는 사람이 정말로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을까?”
-로버트 노직(Robert Nozick), Anarchy, State, and Utopia P.14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국가의 국민이 유권자가 되어 자신을 대변할 수 있는 정치인을 뽑는 제도를 의미한다. 하지만 개인들은 본질적으로 이기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이상적인 민주주의의 형태, 즉 다수의 국민이 공공의 이익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정치인을 선출하여 국가를 운영하는 형태는 달성하기 매우 어렵다. 민주주의라는 개념이 소개된 이래로 지금까지 그 이상을 이룬 적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모든 정치 시스템은 저마다의 이상이 있지만, 그 어떤 시스템도 민주주의와 같이 그 이상을 달성한 적이 없기에 민주주의만 유별나게 실패했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전 세계의 정치 시스템이 시간이 흐르면서 더 나은 제도로 진화해 갔기에, 민주주의 역시 성역이 아니라 언제든지 더 나은 대안이 있다면 교체될 수 있는 제도 정도로 여겨져야 할 것이다.
“공화국에서는 통치자의 폭정으로부터 국민들을 보호하는 것 만큼이나, 하나의 집단이 벌이는 부당한 행위로부터 다른 집단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다[…]만약 다수가 공동의 이익으로 단합한다면, 소수의 권리는 위험에 처할 것이다.”
-제임스 매디슨(James Madison) ,연방주의자 논집 51호(the Federalist Paper #51)
1.2.1 다수의 폭정
민주주의의 문제는 무엇일까? 필자가 위에서도 언급했듯 민주주의는 시스템을 설계함에 있어서 개인의 이기심을 간과했다는 부분에서 큰 문제가 있다. 우리가 흔히 ‘민주주의의 종주국’이라고 이야기 하는 미국의 경우만 보더라도 민주주의 그 자체를 강조하기 보다는 민주주의로 인한 다수의 폭정을 어떻게 시스템적으로 견제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정말 많이 하였다. 미국 정치의 바이블이라고 할 수 있는 [연방주의자 논집, the federalist paper]이나 [헌법, the constitution]만 보더라도 미국의 건국의 아버지들이 어떤 식으로 다수의 폭정을 견제하고 민중의 폭정을 견제할지에 대한 다양한 고민들이 담겨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건국의 아버지들의 노력은 민주주의를 완벽하게 만드는데엔 실패했다. 여전히 민주주의는 다수의 민의에 의해서 움직이고, 정치인들은 다수의 표를 얻기 위해서 국민들에게 입발린 말들을 하기 때문이다.
1.2.2 임기는 양날의 검이다
더 큰 문제는 민주주의가 가진 “임기”에 있다. “임기”는 한 정치인이 장기적으로 집권하는 것을 막을 수 있지만 이러한 임기 제도에는 맹점이 있다: 정치인이 자신의 임기 중에 시작한 정책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부분이다. 예를 들어보자. 특정 정권에서 정부의 지출을 과도하게 늘렸다고 가정해보자. 정부가 지출을 늘리면 대부분의 지출은 재정적자에서 충당된다. 그 이유는 1) 과세를 할 경우 국민들에게 직접적으로 비용을 부과하기 때문에 국민들의 분노를 살 수 있고 자신의 지지율이 떨어질 수 있고, 2) 돈을 찍어서 지출을 감당할 수 있지만 이는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미국과 같은 기축통화 발행국이 아니라면 국가 경제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수 있기 때문이다.
재정적자는 현 세대에서 쓰는 지출을 미래 세대에게 전가하는 행위이므로 근시안적인 관점에서는 매우 효과적인 단기 해결책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문제는 정치인들 대부분이 “임기”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재정적자가 문제가 되는 시점이 되었을 땐 이미 이들은 정계에서 은퇴를 하고 책임을 회피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부분이다.
왕의 경우 부채에 대하여 금기시하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정부의 사적 소유자로서 그와 그의 상속인들은 정부의 모든 부채를 개인적으로 상환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믿고 있는, ‘자연적’ 사회통념에 의해서 구속받는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대통령제 하에서 정부관리인은 자신의 재직기간중에 초래한 채무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진 부채는 미래의 (역시 책임이 없는) 정부가 해결해야 하는 ‘공적부채’로 간주된다. 자신의 채무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책임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기채율은 높아질 것이고 현정부의 지출은 차기정부의 지출로 이전될 것이다.
-한스 헤르만 호페(Hans Hermann Hoppe), 민주주의는 실패한 신인가 P. 78-79(Democracy: the god that failed p. 84)
화폐의 가치를 따져보더라도,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부채를 만든 국가는 민주주의 국가라는 점에서, 민주주의가 결코 장점만 가지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퓨타키(Futharchy)라는 용어를 들어보신 분들이 있는지 모르겠다. 퓨타키는 조지 메이슨 대학교의 경제학 교수인 Robin Hanson 에 의해서 소개된 아이디어로, 쉽게 설명하면 정책을 입안하는 사람들이 자신이 입안하는 정책들이 가져올 결과에 대해서 예측하고 이에 대해서 자산을 베팅하는 형태의 거버넌스를 의미한다. 퓨타키라고 해서 민주주의 방식을 다 없애는 것은 아니고, 정책이 가져올 결과에 대해서는 투표를 통해서 정하고 그 결과를 가져오기 위해서 어떤 정책이 가장 효율적일지에 대한 부분을 “베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퓨타키에서 정책이 선택되고 입안되는 방식은 아래와 같다:
가장 먼저 국가나 퓨타키로 운영되는 집단의 목표 수치를 정한다(GDP라던지, 실업률이라던지)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필요한 정책들을 제안한다.
이 정책들에 대한 예측 시장이 열리고, 사람들은 어떤 정책이 목표 수치를 달성하는데에 있어서 가장 효율적일지에 대한 베팅을 진행한다.
목표한 것을 달성할 확률이 높은 정책이 선택된다.
해당 정책을 통해서 목표한 수치를 달성하면 베팅한 사람들은 돈을 수령하고 반대의 경우에는 돈을 잃는다.
*여기에서 궁금증, “만약에 채택되지 않은 정책에 베팅한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 이 사람들은 돈을 잃지 않는다. 애초에 채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퓨타키의 장점은 더 나은 정책을 도출하는 것에 대한 인센티브가 명확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굉장히 많은 경우에 대중의 예측이 전문가들의 예측보다 더 나은 결과들을 도출하였기 때문에 의사결정 과정이 좀 더 나아질 수 있다. 마지막으로, 정책 입안에 참여한 참여자들은 여기에 경제적인 자산을 베팅했기 때문에 이들이 기대한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서 정책들에 더 많은 애착을 가지고 행동하게 될 것이다. 이는 기존에 민주주의가 가지고 있었던 “아님 말고”식의 마인드셋을 상쇄시킬 수 있다고 판단된다.
확실히 퓨타키에는 여러가지 장점들이 있다. 그리고 필자가 생각했던 민주주의의 “무책임” 문제도 어느정도 해결할 수 있어 보인다. 하지만 Robin Hanson이 제안한 퓨타키는 너무 원초적인 모델인 것으로 보이고 좀 더 현 상황에 맞을 수 있도록 개량하고 변화하여 적용할 필요는 있어보인다. 예를 들어서 현재 대부분 민주주의 국가들이 대의 민주제를 채택하여 자신의 대리인들이 정책을 입안할 수 있도록 하듯, 퓨타키를 도입한 모델에서도 베팅의 주체가 일반 국민들이 아닌 정책을 입안하는 국민들의 대리인으로 두는 것이 예시가 될 수 있겠다. 국민들이 국가가 달성해야하는 목표 수치를 정해주고, 정치인들이 각자 이에 따른 정책들을 제안하고 예측 시장을 통해서 자신들의 월급을 베팅하는 것이다. 월급 그 이상의 제산을 베팅하면 더할나위 없이 좋고. 그렇다면 적어도 정치인들이 단순히 “국민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정책”들을 함부로 내던지지는 않을 것 아닌가.
많은 사람들이 블록체인의 유즈케이스에 대해서 비관적이지만, 필자는 예전부터 블록체인의 가장 큰 효용 중에 하나가 “정치적 실험을 할 수 있는 디지털 공간”이라는 점이라고 생각했다. 새로운 정치 시스템이 등장하면 이 시스템을 국가 단위로 적용하기엔 매우 큰 리스크가 따른다. 해서, 국가와 비슷한 환경이지만 이에 따른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는 블록체인이 이러한 정치적 실험을 하기엔 매우 적합한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현재 블록체인 기반 예측 시장인 폴리마켓이 굉장한 인기를 끌고있는 바, 지금이 퓨타키를 실험해볼 수 있는 적기라고 생각한다.
퓨타키는 굉장히 매력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한계점들과 문제점들도 있기 때문에, 퓨타키 말고도 다른 대안들에 대해서 꾸준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다만 퓨타키가 그냥 민주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는 현 상황은 굉장히 의미가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퓨타키는 시장의 논리를 정책 입안에 적용한 사례 중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퓨타키 말고도 기존 정치 시스템을 시장으로 대체하려는 시도들이 자주 일어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메커니즘 설계 측면에서 보면, 나는 개인적으로 대중들이 예측시장을 포용하는 것은 민주주의에 위협이라고 생각한다. 또 이것은 일정부분 금권정치를 가속할 수 있는 요인이 된다고 생각한다. 예측 시장을 금지할 이유는 없고, 금지 할 수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예측 시장이 무조건적으로 긍정적인 이니셔티브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 누군가는 예측 시장의 규모가 커지면 이에 따라 퓨타키 같은 새로운 시스템이 부상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이는 분명히 맞는 말이지만, 민주주의는 역사상 굉장히 좋은 성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시스템에 대해서 특별히 기대하고 있지는 않다.
나는 시장을 통해 보통 사람들이 모를 수 있거나 접근할 수 없는 정보들을 알아낼 수 있는 집단들을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전문가들은 군중이 자신들보다 낫지 않으면 관심을 갖지 않는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투표에 참여하는 것이 중요한 것보단 결과 중심적인 시스템 내에서 최고의 정보를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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