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돈’을 당연하게 여긴다. 그러나 돈은 언제나 정치적이고, 기술적이며, 제도적 설계의 결과물이었다. 산업화 시대에는 정부와 중앙은행이 발행하고, 은행이 유통을 맡으며, 그 구조 자체가 곧 통화 시스템이었다. 다시 말해, 국가와 은행의 2원 구조가 통화 질서를 이루는 기본 단위였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 이 구조는 균열되고 있다. 프린스턴대학교의 경제학자 마르쿠스 브루너마이어(Markus Brunnermeier)는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현재 진행 중인 디지털 혁명은 전통적인 통화 교환 모델에서의 근본적인 이탈을 초래할 수 있다. 우리는 화폐의 다양한 기능들이 분리(unbundling)되어, 특정 기능에 특화된 통화들 간의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는 상황을 목격하게 될 수도 있다. 반면, 대형 플랫폼 생태계와 연계된 디지털 화폐는 다양한 데이터 기반 서비스들과 결제 서비스를 하나의 패키지로 묶는 방식의 재통합(re-bundling)을 야기할 수 있으며...”
“The ongoing digital revolution may lead to a radical departure from the traditional model of monetary exchange. We may see an unbundling of the separate roles of money, creating fiercer competition among specialized currencies. On the other hand, digital currencies associated with large platform ecosystems may lead to a re-bundling of money in which payment services are packaged with an array of data services,...”[1]
즉, 브루너마이어 교수는 디지털 시대의 통화는 더 이상 국가와 은행만으로 완결되지 않고, 국가, 은행, 테크기업의 3원 구조로의 이행이 불가피하다고 피력했다. 이는 테크기업이 반드시 화폐를 발행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통화 시스템의 구조적 변화에 대한 핵심적인 시사점을 제공한다.
첫째, 통화 인프라의 설계와 운용 주체가 다양화되고 있다. 전통적으로 정부와 은행이 독점하던 통화 시스템의 중심 역할을 이제는 민간 테크기업들도 일부 분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둘째, 신뢰(trust)의 구현 방식이 제도(institution) 중심에서 구조(structure)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다. 중앙집중적 기관에 의존하던 신뢰가 점차 분산된 기술 구조, 혹은 네트워크 설계 그 자체로 대체되며 새로운 형태의 신뢰 메커니즘이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의 신뢰는 중앙은행의 보증, 은행 면허, 예금자 보호와 같은 법제적 장치 위에 구축되었다. 하지만 지금의 디지털 통화 환경에서는 스마트컨트랙트, 리저브 공시, 실시간 감사, 상환 알고리즘 등 설계 구조 그 자체가 신뢰의 근거가 된다. 이러한 전환은 기술 실험이 아니다. 이는 돈이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 질문, 즉 “통화 인프라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에 대한 구조적 논쟁이다. 그 중심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스테이블코인(stablecoin)’이다. 스테이블코인은 단지 하나의 가상화폐 종목이 아니다. 이것은 디지털 시대에 통화를 설계하고 신뢰를 구조화하는 방식에 대한 하나의 제안이자 실험이다. 준비자산, 발행·상환 구조, 코드 기반 신뢰, 분산형 운영 메커니즘 등은 모두 새로운 ‘디지털 머니’ 시대의 인프라 구성 요소로 작동한다.
이러한 구조 기반의 신뢰 방식은 단순한 기술 실험이나 산업적 시도에 그치지 않고, 학계와 국제기구들로부터 디지털 시대 통화 질서의 핵심 구조로 주목받고 있다. 통화 시스템이 제도적 권위(institutional authority)에 기반해 신뢰를 구축하던 기존 방식에서, 기술과 설계 중심의 구조적 신뢰로 전환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통찰은 다양한 학술적 논의와 정책 보고서에서 반복적으로 확인된다.
먼저, 프린스턴대학교의 경제학자 마르쿠스 브루너마이어(Markus Brunnermeier)는 디지털 시대에 화폐의 기능이 분리되고 있으며, 이에 따라 국가, 은행, 테크기업 간의 삼원 구조(tripartite structure)가 통화 질서의 핵심으로 부상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그는 디지털 시대의 통화는 더 이상 국가와 은행만으로 완결되지 않는다고 지적하며, 다양한 주체들이 통화 시스템에서 독립적 역할을 수행하게 될 것으로 전망하였다[1].
유럽경제정책연구센터(CEPR)의 연구진 또한 디지털 생태계에서의 통화 질서 재편 가능성에 주목하며, 플랫폼을 기반으로 한 통화 영역 개념인 “디지털 화폐 영역(Digital Currency Areas)”을 제안하였다. 이 개념은 전통적인 법정통화 중심의 통화권(monetary areas)이 디지털 플랫폼 중심의 구조로 전환될 가능성을 설명하며, 기술 구조와 경제활동의 통합이 통화 주권의 새로운 형태를 낳고 있음을 시사한다[2].
국제결제은행(Bank for International Settlements, BIS)은 이러한 구조적 변화가 규제 모델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분석한다. BIS는 스테이블코인의 확산과 함께 전통적인 외부 감독(external supervision)이 점차 기술에 내장된 실시간 감독 체계(embedded supervision)로 전환되고 있으며, 이러한 시스템은 블록체인 기술과 스마트컨트랙트를 활용하여 규제 이행을 실시간으로 자동화하는 방식으로 설명된다[3].
미국 국립표준기술연구소(National Institute of Standards and Technology, NIST) 또한 스테이블코인의 기술적 신뢰 구조를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NIST는 실시간 공시(disclosure), 준비자산의 자동 검증(auditing), 스마트컨트랙트를 통한 상환 시스템(redemption mechanism) 등을 통해, 스테이블코인이 어떻게 전통적 은행의 기능을 기술적으로 대체하거나 보완할 수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이러한 구조는 중앙기관의 개입 없이도 신뢰를 구현할 수 있는 기술 기반 메커니즘의 가능성을 보여준다[4].
결국, 이러한 논의들은 디지털 통화 질서가 더 이상 제도적 권위만으로는 유지될 수 없으며, 코드와 구조를 통해 신뢰를 구현하는 새로운 체계로 전환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구조는 기술 설계의 차원을 넘어, 정치경제적 질서와 통화 주권 개념까지 재편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제도기반 신뢰 vs. 구조기반 신뢰
Source: 해시드오픈리서치
한국에서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논의는 아직 제도적으로 확정된 바 없으며, 어떤 구조가 채택될지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제도 설계의 방향성이 ‘은행 기반 모델’로 기울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 이는 현재까지 한국이 참고할 수 있는 글로벌 레퍼런스 모델의 성격과 제도 수용성의 관성에서 비롯된다.
가장 대표적인 비교 대상은 유럽연합의 MiCA(Markets in Crypto-Assets Regulation) 법안과 일본의 스테이블코인 법이다. 두 제도 모두 일정 수준 이상의 발행·유통 구조를 허용하되, 은행 또는 은행에 준하는 기관, 일정 요건을 갖춘 민간사업자가 발행을 담당하는 모델을 전제로 하고 있다. 특히 일본은 2023년부터 은행에만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허용하며, 준비자산의 보유처와 운용 방식에 대한 강한 규제를 두고 있다. MiCA 의 경우 민간 발행을 허용하지만, 준비자산 요건과 발행자 요건 모두 기존 금융기관의 인프라에 편입되는 방식으로 설계되어 있다.
한국은 디지털 자산 기본법과 스테이블코인 관련 법제를 아직 구체화하고 있는 단계이지만, 정책 설계 초기 단계에서 이러한 해외 사례들을 참조할 가능성이 높다. 미국의 경우 STABLE Act 등 민간 발행 모델이 논의되고 있으나, 아직 연방법 수준에서 제도화되지 않았으며, 다양한 모델이 병존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현재 한국의 논의는 공식적으로 은행 기반 모델을 채택한 것은 아니지만, 제도 수용성, 금융 감독 체계와의 정합성, 그리고 국제 입법 사례들과의 유사성을 고려할 때 은행 중심 모델로 자연스럽게 기울 수밖에 없는 구조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몇 가지 주요 요인에서 기인한다.
첫째, 정책 설계의 기본 전제가 제도 수용성과 금융 안정성 유지에 방점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기존 금융 감독 체계 내에서 통합적으로 규율할 수 있는 구조가 선호되고 있으며, 셋째로, MiCA와 일본 사례가 제도적 안정성과 실현 가능성 측면에서 참고 가능한 모델로 기능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은행 기반 모델은 아직 채택되지 않았지만, ‘채택 가능성이 높은 기본값’으로 작동하고 있다.
그러나 앞선 1.1절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디지털 화폐 시대의 신뢰 구조는 점차 기능 분산형 설계와 기술 기반 구조로 이동하고 있으며, 그 흐름은 글로벌한 기술·제도 환경 속에서 이미 현실로 작동하고 있다.
결국, 지금 한국이 직면한 과제는 기존 제도의 연장선에서 제도를 구축할 것인가, 아니면 디지털 환경에 적합한 구조적 재설계의 출발점으로 삼을 것인가에 대한 정책적 선택의 문제다.
앞서 1.2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의 스테이블코인 제도화 논의는 아직 확정되진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은행 기반 모델을 기본값처럼 전제하는 흐름 속에 있다. 이는 MiCA(유럽), 일본법 등의 선례를 참조하는 현실적 경로이기도 하다. 이들 법률은 규범적 명확성을 갖췄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특히 일본은 2023년 세계 최초로 스테이블코인 발행에 대한 법적 체계를 명문화했고, MiCA는 EU 전체에 적용되는 일관된 프레임을 제시했다.
그러나 흥미로운 점은, 이렇게 제도를 선도적으로 정비한 유럽과 일본 모두에서 스테이블코인 산업이 본격적인 성장궤도에 오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유럽의 경우, 유로화에 연동된 스테이블코인은 글로벌 시장에서의 유통량이 극히 미미한 수준에 머물러 있으며, 실사용 기반이 취약하다. 반면 일본은 법적 정비가 가장 빠르게 이뤄졌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발행된 스테이블코인의 수가 극히 제한적이며, 글로벌 거래소나 탈중앙화 금융(DeFi) 생태계에서의 활용도 역시 매우 낮은 수준에 그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단지 시장의 보수성이나 정책 시행 초기라는 점으로만 설명되기 어렵다. 오히려 규제 설계에 내재된 구조적 제약 요인이 함께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은행에 의존한 발행 구조, 제도적 리스크 회피에 치중한 설계, 그리고 혁신보다는 안정성을 우선시한 정책 방향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민간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인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낸 것이다.
확장성 부재: 은행 중심 구조는 민간 기업, 디지털 자산 플랫폼, 글로벌 블록체인 인프라와의 연동이 어려운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디파이(DeFi)와 Web3 지갑, 글로벌 결제 애플리케이션은 대부분 블록체인 상의 API 구조와 스마트컨트랙트 환경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은행 기반 모델은 이런 환경에 유연하게 적응하기 어렵다.
리워드 설계의 제약: 은행 예금 기반 모델은 원칙적으로 ‘이자 없는 준비금’을 전제로 하며, 준비자산에서 발생한 수익은 대부분 은행의 수익으로 귀속된다. 이는 스테이블코인 보유자에게 담보금을 기반으로한 이자 혹은 리워드(보상)를 플랫폼 내에서 한정적으로 제공하는 USDC, PYUSD 등과 비교해 사용자 유인 측면에서 불리한 구조다.
기술 혁신과의 거리감: 스테이블코인의 핵심은 ‘코드에 의한 신뢰’, ‘프로그램 가능한 금융’에 있다. 그러나 은행 중심 구조는 보안성이나 회계투명성은 갖출 수 있으나, 스마트컨트랙트 기반 자동 상환 구조, 온체인 공시, 실시간 리저브 검증 등 기술적 신뢰 구조의 구현에는 제한적이다.
국제 연동성과 경쟁력 부족: 스테이블코인 시장은 사실상 ‘달러화 기반 민간 스테이블코인(USDT, USDC 등)’이 독점하고 있다. 이들은 민간기업이 자본시장 구조와 기술 기반 신뢰를 결합해 빠른 속도로 시장을 장악했다. 반면 은행 중심 국가 기반 모델은 민간 참여 유인이 약하고, 글로벌 디지털 자산 생태계와의 호환성도 낮다.
결과적으로, 유럽과 일본의 사례는 스테이블코인 제도화에 있어 중요한 교훈을 제공한다. 제도적 명확성과 법적 정비는 산업의 성장을 위한 필수 조건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법과 제도가 실제 시장의 기술 발전 흐름, 사용자 행동의 동인, 그리고 글로벌 금융 인프라와의 연동성 등과 유기적으로 맞물려 있지 않으면, 제도는 실질적으로 작동하지 않을 수 있다.
이는 한국이 스테이블코인 제도화를 추진함에 있어 단순히 “법을 먼저 만드는” 접근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시사한다. 제도의 골격을 설계할 때, 어떤 구조를 기준점으로 설정할 것인지, 그리고 해당 구조가 시장 참여자들에게 실질적으로 작동 가능한 환경을 제공할 수 있을지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 규제의 목적이 단순한 형식적 정비에 그쳐서는 안 되며, 기술·시장·글로벌 네트워크와의 정합성 위에서 실제로 작동하는 프레임워크를 지향해야 한다.
앞선 장들에서 살펴보았듯, 은행 기반 모델은 제도적 수용성이나 감독 정합성 측면에서는 직관적일 수 있으나, 확장성·연동성·기술적 신뢰 구현이라는 핵심 요건에서는 구조적 한계를 노출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대안은 무엇인가?
글로벌 스테이블코인 시장에서 실제로 성장하고 있는 구조는 대부분 자본시장 기반 모델에 가까운 형태를 보이고 있다. 이는 민간 기업(특히 자산운용사, 핀테크 기업 등)이 발행을 주도하고, 준비자산은 MMF, 국채, RRP(역환매조건부채권) 등으로 구성되며, 상환과 회계감사, 공시는 스마트컨트랙트 기반 자동화 시스템과 외부 회계 감사 구조로 설계되는 특징을 갖는다.
Circle(USDC)의 구조
Source: 해시드오픈리서치
Circle(USDC) 시장현황(2024년 기준)
Source: 해시드오픈리서치
이러한 구조는 미국 내뿐만 아니라 글로벌 결제망, 디파이(DeFi), NFT, Web3 서비스 등 다양한 환경에서 활용되며, 기존 은행 인프라 없이도 신뢰가 구조적으로 유지되는 대표 사례로 자리잡았다.
스테이블코인 중 가장 오랜 기간 시장을 지배해온 프로젝트는 단연 ‘Tether(USDT)’다. 2014년 출시된 USDT는 준비자산 불투명성, 감사 미비, 은행과의 단절, 법적 분쟁 등 수많은 논란과 의혹 속에서도 글로벌 시장의 60% 이상을 점유하며 살아남았다.
Tether(USDT) 시장현황(2024년 기준)
Source: 해시드오픈리서치
초기에는 혼합 리저브 구조(현금, 상업어음 등)에 의존했지만, 이후 미국 국채 중심의 자산 포트폴리오로 전환하고, 외부 감사 보고서 공개, 다수 커스터디 기관을 통한 멀티뱅크 분산 전략 등 결과적으로 자본시장 기반 모델에 가까운 구조로 진화했다. 이는 전략적 설계가 아니라 “by necessity”, 즉 은행 시스템의 접근 차단이라는 현실 조건 하에서 진화한 생존형 모델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Tether는 자본시장 기반 모델의 유효성을 시장 위에서 실제로 증명해낸 실험적 생존 사례다.
자본시장 기반 모델의 특성
Source: 해시드오픈리서치
자본시장 기반 구조는 ‘기술 기반 신뢰’와 ‘시장 유연성’을 결합함으로써, 스테이블코인을 실제로 작동하게 만든다.
앞선 장들에서 우리는 은행 기반 모델이 디지털 화폐 시대의 기술적 흐름 및 글로벌 구조와 충돌하고 있음을 살펴봤고, 자본시장 기반 모델이 실제 시장에서 생존하고 성장하고 있는 구조임을 확인했다. 이제는 이 두 모델이 정책 설계, 기술 구현, 시장 연동성 측면에서 어떤 구조적 차이를 갖는지를 본격적으로 비교해야 할 시점이다. 다음 비교표는 구조의 핵심 설계 요소를 기준으로 정책적 판단을 위한 기준 프레임으로 정리한 것이다.
은행기반 모델과 자본시장 기반 모델 비교
Source: 해시드오픈리서치
은행 기반 모델은 제도 정합성과 보수적 안정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는 초기 제도 도입과 금융안정 프레임에서는 효과적일 수 있다. 그러나 디지털 화폐의 핵심 흐름인 확장성, 분산성, 투명성, 유연한 리워드 설계, 글로벌 연동성 측면에서는 명백한 제약이 있다. 반면 자본시장 기반 모델은 실제 시장에서 이미 작동하고 있으며, Circle, Tether, TUSD 등의 사례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작동 가능한 신뢰 구조’를 입증하고 있다. 기술적 구현, 시장 적합성, 민간 유인, 글로벌 연동 등 거의 모든 항목에서 구조적 우위를 확보하고 있다. 따라서 정책의 판단 기준은 “누가 발행하는가”가 아니라 “어떤 구조가 작동하는가”로 전환되어야 한다. 이 비교는 단지 스테이블코인에 국한된 선택이 아니다. 이는 한국이 디지털 금융 질서에서 어떤 구조를 통해 국제 경쟁력을 확보할 것인가, 어떤 시스템을 설계 기준으로 삼을 것인가에 대한 전략적 선택이다.
한국은 기술 인프라, 자본시장, 디지털 자산 수요, 글로벌 연동성 측면에서 매우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테이블코인 제도화 논의는 아직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다. 기존 금융당국은 위험 통제를 우선시하는 경향이 강하고, 은행 기반 설계에 대한 선호 역시 제도적 관성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이야말로 한국이 단순한 규제 수용이 아니라, 제도 설계의 방향성을 결정해야 할 시점이다. 자본시장 기반 프레임을 전략적으로 선택하는 것은 단지 민간 참여를 허용하는 문제가 아니라, 디지털 통화 시대의 경제 주권과 경쟁력 확보라는 관점에서 중요한 기회가 될 수 있다.
한국은 이미 디지털 금융 기술 인프라에서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국내에는 유의미한 수준의 블록체인 기술사, 디지털 자산거래소, 커스터디 인프라, Web3 기반 스타트업이 존재한다. 또한 토큰화, NFT, RWA 등으로 확장 가능한 사용자 기반도 빠르게 형성되고 있다.
이러한 환경에서 자본시장 기반의 스테이블코인 프레임워크를 채택하게 될 경우, 다음과 같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첫째, 민간 기업의 발행 참여가 가능해지며, 글로벌 스테이블코인 네트워크와의 연동성이 높아진다. 둘째, 커스터디, 회계 감사, 준비자산 운용 등 다양한 금융 산업이 연계되어, 새로운 디지털 자산 기반 금융 생태계가 조성될 수 있다.
예컨대, “한국형 구조” 시나리오를 상정해볼 수 있다. 이 모델에서는 민간 금융사 또는 핀테크 기업이 발행 주체로 참여하되, 등록 요건 및 공시 의무를 충족해야 한다. 준비자산은 MMF, 국채, 현금성 자산 등으로 구성된 분산형 구조를 따르며, 외부 감시 체계가 병행된다. 회계 감사는 지정된 외부기관이 주기적으로 수행하고, 결과는 공시를 통해 시장에 제공된다. 상환 구조는 API 기반의 자동 정산 시스템과 스마트컨트랙트를 통한 환매 시스템이 결합되어, 기술 기반 신뢰를 실현하는 구조를 형성한다.
현재 한국의 금융시장에는 이미 달러화 기반의 민간 스테이블코인이 광범위하게 유입되어 있으며, 글로벌 거래소와 디파이(DeFi) 환경에서는 USDT, USDC 등 외화 연동 스테이블코인을 중심으로 한 자산 운용이 일상화되어 있다. 이러한 현실은, 만약 한국이 자체적인 제도 정비를 지체한다면, 타국이 주도하는 스테이블코인 질서가 국내 시장을 규정짓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시사한다.
자본시장 기반 프레임은 이러한 글로벌 질서와의 정합성 측면에서 가장 유연한 대응이 가능한 구조다. Circle, Paxos, MakerDAO, PayPal 등 다양한 글로벌 발행자들과 상호 인증 체계를 구축하고, 블록체인 상의 준비자산(리저브) 확인 메커니즘, 글로벌 결제 네트워크와의 연동 등을 통해 한국 내 서비스의 국제 경쟁력을 실질적으로 확보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자본시장 기반 구조는 단순히 하나의 정책적 선택지를 넘어, “글로벌 구조와 호환 가능한 사실상 유일한 선택지”라고 평가할 수 있다.
한국이 직면한 질문은 단순히 ‘스테이블코인을 허용할 것인가’라는 선택지에 머무르지 않는다. 보다 근본적인 수준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구조적 질문과 마주하고 있다. 첫째, 디지털 시대에 통화 인프라의 신뢰는 어떤 방식으로 설계되어야 하는가? 둘째, 통화와 결제의 주권은 이제 누구와, 어떤 구조로 나누어야 하는가? 셋째, 글로벌 디지털 화폐 질서 속에서 한국은 어떤 원칙과 방식으로 중심을 형성할 것인가?
이 보고서는 이러한 질문에 응답하기 위해, 1장에서 ‘신뢰의 구조화’라는 개념적 전환을 제시하였고, 2장에서 4장에 걸쳐 각국의 제도화 방향성과 구조적 차이를 비교하며 실증적인 분석을 제공하였다. 이어 5장에서는 자본시장 기반 스테이블코인 프레임이 한국에 가지는 전략적 의의와 실행 가능한 구조 시나리오를 구체적으로 제안하였다. 이를 통해 본 보고서는 단순한 규제 검토를 넘어, 새로운 통화 질서를 설계하기 위한 정책적 사고의 전환을 촉구하고 있다.
한국은 유럽연합(MiCA)이나 일본에 비해 스테이블코인 관련 입법 시점이 다소 늦은 편에 속하지만, 이는 오히려 제도 설계에 있어 전략적 유리함으로 전환될 수 있다. 앞서 제도를 정비한 국가들은 주로 은행 중심의 신뢰 구조에 기초한 규제를 택하였으나, 결과적으로 시장의 실질적 확장에는 실패했다. 이러한 시행착오와 구조적 한계를 면밀히 분석하고 학습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한국은 ‘더 나은 구조로의 진입’을 위한 세컨드 무버 어드밴티지(second-mover advantage)를 확보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디지털 시대의 신뢰는 더 이상 제도적 면허나 행정적 승인만으로 보장되지 않는다. 그것은 설계되어야 하며, 코드로 구현되고, 구조를 통해 검증되어야 한다. 신뢰는 이제 기술과 구조 위에 구축되는 시대다.
이제 한국은 단순한 ‘규제 허용자’의 자리에 머물 것이 아니라, 디지털 통화 질서를 공동 설계하는 능동적 플레이어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기로에 서 있다. 국내에는 이미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기술력과 민간 참여 역량이 존재한다. 필요한 것은 제도의 방향성과 구조 설계에 대한 주도권이다.
그 기준선은 자본시장 기반의 신뢰 구조 설계에 있다. 이는 국내 금융 생태계의 확장성과 글로벌 질서와의 정합성을 동시에 충족할 수 있는 유일한 구조적 해법이다. 따라서 지금의 선택은 단순한 규제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이 디지털 화폐 시대의 질서를 ‘수용’할 것인지, ‘주도’할 것인지를 결정짓는 전략적 기회다.
이 모든 논의는 하나의 전제 위에 서 있다:
“신뢰는 설계될 수 있다. 그리고 그 구조는 지금, 우리가 만들 수 있다.”
[1] Brunnermeier, M. K., James, H., & Landau, J. P. (2019). The Digitalization of Money. NBER Working Paper No. 26300. National Bureau of Economic Research.
[2] Eichengreen, B., et al. (2019). Digital Currency Areas. CEPR Discussion Paper No. DP14065. Centre for Economic Policy Research (CEPR).
[3] Auer, R. (2019). Embedded Supervision: How to Build Regulation into a Blockchain. BIS Working Papers No. 811. Bank for International Settlements.
[4] NIST (2023). Stablecoin Systems and Trust Architecture: An Overview. U.S. National Institute of Standards and Technology, Technical No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