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블록체인의 성패는 고성능·저수수료보다 킬러 애플리케이션 유무에 달려 있다. 킬러 앱 없는 체인은 타이틀 없는 게임 콘솔에 불과하다.
신생 체인의 전략은 두 가지다: ① 기존 대비 10배 기술 혁신을 일으키거나 (훨씬 드문 사례) ② 히트 앱을 먼저 출시한 뒤 이를 체인으로 확장하는 앱 우선 전략이 바로 그것이다. 오늘날 시장 환경은 후자에 훨씬 유리하다.
하이퍼리퀴드와 앱스트랙트는 앱 출시 → 사용자 락인 → 맞춤형 체인 확장 → 유동성·빌더 유입 → 해자 구축이라는 공식을 입증한다.
차세대 블록체인은 처음부터 체인으로 등장하지 않고, 중독성 게임·핵심 금융 툴·소셜 네트워크 등으로 출발해 생태계로 진화할 가능성이 높다.
기술사에서 성공적 플랫폼은 언제나 킬러 애플리케이션을 연료로 성장해 왔다. 스티브 발머 전 마이크로소프트 CEO는 “플랫폼에는 앱이 필요하다. 앱 없이 플랫폼만으로는 진창에 빠진다”는 말로 이 사실을 단번에 요약했다. 윈도우에는 오피스, 익스체인지 서버에는 아웃룩이 있었다. 이런 퍼스트파티 애플리케이션(first-party application)이 플랫폼을 ‘없어서는 안 될 인프라’로 격상시킨다.
크립토 분야도 다르지 않다. 그간 다수 블록체인 프로젝트는 범용 L1을 구축해 놓고 애플리케이션 개발을 100% 외부 빌더에 의존해 왔다. 5~10년 전에는 통했지만, 오늘날 속도와 수수료를 과시하는 블록체인들이 넘쳐나는 상황에서 킬러 앱 없는 체인은 게임 타이틀 없는 콘솔에 지나지 않는다.
플래시봇(Flashbot)과 라이도(Lido) 리서처 Hasu는 신생 체인이 취할 수 있는 길을 두 가지로 제시한다.
경로 1: 10배 기술 우위. 모든 측면에서 기존 체인을 압도할 만큼 뛰어난 성능을 구현해 개발자와 사용자를 흡수한다. 그러나 핵심 레이어에서 10배 개선을 달성하기는 갈수록 어렵다.
경로 2: 앱 우선(App-First) 후 플랫폼화. 먼저 게임∙거래소∙소셜 네트워크 등 시장이 즉각 원하는 서비스를 성공시킨 뒤, 확보한 사용자 기반과 도메인 지식을 토대로 전용 체인을 구축한다. 이 전략은 ‘플랫폼 먼저, 빌더는 나중’이라는 닭이냐 달걀이냐 문제를 우회하며, Hasu 역시 “여러 면에서 지배적으로 우월하다”고 평가한다.
범용 L1 시장이 포화된 현재, 앱 우선 전략이 오히려 현실적이다. 외부 빌더를 기다리기보다 직접 레퍼런스 앱을 만들어 성장 모멘텀을 확보하는 편이 빠르다.
블록체인의 가치는 네트워크 효과, 즉 사용자와 애플리케이션의 규모로 측정된다. 앱이 없는 신규 체인은 콜드 스타트 문제(cold start problem)에 갇힐 수밖에 없다. 반면, 단 하나의 킬러 앱만으로도 유저·자본·빌더의 관심이 한꺼번에 빨려 들어온다.
내재적 앱 개발은 체인 설계를 특정 문제 해결에 최적화하게 만든다. ‘만들면 오겠지’ 식 범용 체인과 달리, 필요 기능과 성능 목표가 명확해진다. 아마존이 서점에서 출발해 만물상으로, 페이스북이 대학 SNS에서 글로벌 플랫폼으로 확장한 과정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결국 체인 자체는 제품이 아니다. 금융·게임·소셜 등 구체적 문제를 해결하는 애플리케이션이 체인의 존재 가치를 규정한다. 이는 프로토콜-마켓 핏(protocol-market fit)이 아닌 제품-마켓 핏(product-market fit)을 팀에 요구한다.
더불어 공간 공동화(co-location) 효과도 발생한다. 대표 앱이 자체 체인에서 성공을 거두면, 인접 서비스가 유동성과 사용자 기반을 공유하려 같은 생태계에 탑승한다. 이는 한 디파이 프로토콜의 성공이 후속 금융 앱을 끌어들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퍼스트파티 앱을 선행 구축하는 행위 자체가 팀의 실행력을 증명한다. 고품질 자체 제품은 “이미 수백만 사용자가 여기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며 외부 빌더에게 신뢰를 제공한다.
하이퍼리퀴드(Hyperliquid)
Hyperliquid는 초고속 오더북 DEX로 출발해 독자 L1(HyperEVM)로 확장한 전형적 앱-퍼스트 모델이다. 일일 거래량 기준 바이낸스 11.2%, 바이비트 24.1%, OKX 22.1%를 차지하고, 미결제약정(OI) 비중은 각각 21.7%, 29.0%, 47.8%에 달한다. 현재까지 트레이더 48.1만 명, 누적 거래량 1.59조 달러, HLP 볼트 TVL 4.15억 달러, TVL 15.7억 달러을 기록했다. 즉, 거래소는 유저를 끌어들이는 쇼룸이고, 전용 L1은 이탈을 막는 해자 역할을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새 지갑·API 트레이더·추가 유동성이 유입되며 이 해자는 더욱 견고해진다.
앱스트랙트(Abstract)
콘슈머 크립토 영역에서는 앱스트랙트가 동일한 전략을 구사한다. 자체 플랫폼인 Abstract Portal은 XP·뱃지·업보트 엔진으로 게임 가시성과 초기 유저 풀을 확보한다. Abstract Global Wallet(AGW)은 이메일∙패스키 기반 온보딩과 가스 추상을 제공해 진입 장벽을 최소화했다. 결과적으로 사용자 201만 명, 누적 트랜잭션 7,640만 개, TVS (Total Value Secured) 8500만 달러, 그리고 33개의 인디 게임을 유치했다. 앱스트랙트 내 주요 게임 중 하나인 온체인 히어로즈(OnChain Heroes)는 1만개의 NFT를 0.069 ETH에 완판하고, 며칠 만에 1,100 ETH 이상의 2차 거래량을 기록하며 블록체인 전체 거래량 1위에 올랐다.
두 사례 모두 앱 출시 → 사용자 유치 → 맞춤형 체인 구축 → 신규 빌더·유동성 유입 → 해자 확대라는 동일한 공식을 증명한다.
차세대 블록체인은 애초에 블록체인이라는 모습으로 출발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중독성 높은 게임, 필수 금융 툴, 강력한 소셜 네트워크 등 앱 형태로 등장해 사용자와 데이터를 축적한 뒤, 블록체인 생태계로 진화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L1 개발팀은 앱 구축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특정 분야에 특화된 설계 역량을 갖췄다면, 애부터 출시하여 시장을 장악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체인 위에서 수요와 가치를 창출하는 앱은 그 자체로 가장 강력한 네트워크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최근 크립토 커뮤니티는 복잡한 컨센서스 프로토콜, ZK, 모듈러 블록체인과 같은 인프라 프로젝트에 대해 엄청난 피로감을 느끼고 있다. 이는 당연한 것이, 지금까지의 블록체인 생태계의 대부분 인프라의 발달과 함께했으며, 대부분의 활동, 논의, 투자가 인프라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더리움 L2 네트워크가 활성화된지는 불과 4년이 채 되지 않았으며, 셀레스티아, 어베일, 아이겐DA와 같은 데이터 가용성 솔루션이 활성화된지는 이제 막 1년이 지났다. 수 년전부터 언급되던 ZK 기술은 사실상 아직도 널리 채택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즉, 아직까지도 블록체인 인프라는 현실 세계의 어플리케이션을 구현하기에 많이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행인 것은 최근들어 사용자들에게 실질적인 효용을 제공하는 어플리케이션들이 하나, 둘 씩 등장하고 있다. 이는 최근 다양한 블록체인 최적화 기술들의 발달로 인해, 이제서야 가능해진 것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과거 마이크로소프트, 애플이 등장하기 이전에도 마찬가지로 마이크로프로세서, 메모리, 스토리지, 디스플레이, 운영체재 등 인프라와 관련된 논의, 연구, 개발이 주를 이루었다. 마이크로소프트와 애플이 킬러앱을 가지고 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도 인프라의 발달이라는 기반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젠 크립토 커뮤니티에서 “아직도 인프라가 부족해”라는 주장은 핑계같이 들릴 것이다. 다양한 모듈러 스택, 성능이 극대화된 모놀리틱 네트워크 등 어플리케이션을 빌딩할 수 있는 기반은 충분하다. 이제는 웹3 마이크로소프트, 애플이 등장할 시기이며, 인프라와 함께 킬러앱을 가져오는 것이 생태계의 새로운 표준이 될 것이다.
하지만 하나 확실히 하고싶은 것은 블록체인 산업에서 앱이 먼저냐, 인프라가 먼저냐에 대한 논의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웹2 인터넷 생태계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통신, 하드웨어, AI 기술 등의 인프라 발전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왔으며, 이는 새로운 어플리케이션의 등장을 이끌었다. 블록체인 산업도 마찬가지로 인프라의 발달은 어플리케이션의 발달을 이끌 것이고, 어플리케이션의 기술적 수요는 다시 인프라의 발달을 이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