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일, 이더리움의 후사카 업그레이드가 진행될 예정이다. 후사카 업그레이드는 PeerDAS와 BPO 포크 등 블롭 확장성 관련 합의 레이어 업데이트, 그리고 실행 레이어의 가스비 및 블록 크기 제한 등을 상향시키는 실행 레이어의 업데이트로 대표된다.
후사카 업그레이드는 L2 롤업들이 외부 데이터 가용성 솔루션 대신 이더리움 자체의 보안을 그대로 활용하면서 확장할 수 있는 길을 열 것이며, 롤업 생태계가 이더리움에 더 강하게 결속될 수 있는 기반을 다진다.
수천 개의 노드가 합의해야 하는 탈중앙화 네트워크에서 7개월 만에 12개의 EIP를 조율해 적용하는 것은 결코 느린 것이 아니며, 이러한 점진적이고 신중한 진화 방식이야말로 이더리움이 수많은 "킬러" 체인들 사이에서 여전히 가장 큰 생태계를 유지하는 비결일 것이다.
Source: Ethereum
2025년 12월 3일, 이더리움 네트워크는 17번째 주요 업그레이드인 후사카(Fusaka)를 메인넷에 활성화할 예정이다. 후사카라는 이름은 실행 레이어 업그레이드 명칭인 오사카(Osaka)와 합의 레이어 업그레이드 명칭인 후루(Fulu, 중국 천문학에서 명명한 카시오페이아 별자리의 별 이름)를 합성한 것으로, 이더리움의 전통적인 명명 규칙을 따른다.
2025년 5월에 적용된 펙트라 업그레이드 이후 약 7개월 만에 진행된 이번 업그레이드는, 이더리움이 연간 두 차례의 하드포크를 목표로 하는 가속화된 개발 일정의 일환이다. 후사카는 펙트라에서 볼 수 있었던 극적인 사용자 경험 혁신이나 스테이킹 수정 사항을 포함하지 않지만, 2022년 더 머지(The Merge) 이후 가장 큰 네트워크 확장성 향상을 목표로 한다.
후사카 업그레이드에 포함된 핵심 EIP들을 모아보면 아래와 같다.
[합의 레이어]
EIP-7594: 블롭 데이터의 샘플링을 통해 노드의 다운로드 부하를 줄이고, 롤업의 데이터 처리 용량을 확대
EIP-7892: 블롭 용량 조정을 위한 최소 하드포크 메커니즘. 네트워크 업그레이드 없이도 점진적 확장 가능
EIP-7918: 블롭 가스 비용의 최소 가격 설정으로 수수료 시장 안정화 도모
[실행 레이어]
EIP-7642: 체인 히스토리 만료 및 영수증 단순화로 노드 동기화 속도와 저장 공간 절감
EIP-7823: 모듈러 지수 연산의 비용 및 한도 최적화로 암호화 작업 효율화
EIP-7825: 단일 트랜잭션 가스 상한 설정으로 네트워크 과부하 방지
EIP-7883: 모듈러 지수 연산 프리컴파일(ModExp) 가스 비용 재조정
EIP-7910: 합의/실행 레이어 간 통신 개선
EIP-7917: 제안자(Proposer) 스케줄의 온체인 예측 가능성 향상
EIP-7934: 블록 크기 제한으로 안정성 확보
EIP-7935: 블록당 가스 한도를 36M에서 60M으로 상향 조정하여 L1 처리량 향상
EIP-7939: 선행 0 카운트 연산을 위한 새로운 EVM 오프코드 추가로 수학/비트 연산 비용 절감
물론 이러한 간단한 설명만으로는 각 업데이트 사항이 갖는 의미를 온전히 파악하기 힘들다. 따라서 이어지는 섹션에서는 후사카 업그레이드에 포함된 EIP들 중 핵심이 되는 것들을 중심으로, 각각이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시되었으며, 일반 사용자와 개발자, 그리고 전체 이더리움 생태계에 어떤 미래를 열어줄 수 있을지 보다 쉬운 설명으로 돌아보겠다.
만약 넷플릭스가 모든 영화와 드라마의 전체 데이터를 당신의 휴대폰에 다운로드해야만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면 어떨까? 휴대폰 저장 공간은 순식간에 가득 차고, 월간 데이터 비용은 천문학적으로 치솟을 것이다.
이더리움의 롤업들도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롤업은 수많은 트랜잭션을 묶어서 이더리움 메인넷에 '블롭(blob)'이라는 형태로 데이터를 게시한다. 문제는 후사카 이전까지 모든 풀 노드가 이 블롭 데이터 전체를 다운로드하고 저장해야 했다는 점이다. 롤업의 사용량이 증가할수록 노드 운영자들의 대역폭과 저장 공간 요구 사항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이는 탈중앙화의 핵심인 '일반인도 노드를 운영할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을 위협했다.
Source: Jarrod Watts
EIP-7594로 도입된 PeerDAS(Peer Data Availability Sampling)는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한다. PeerDAS의 핵심 아이디어는 데이터 가용성 샘플링(DAS)으로, 노드가 전체 블롭 데이터를 다운로드하지 않고도 해당 데이터가 실제로 존재하고 이용 가능한지 검증할 수 있게 하는 기술이다.
도서관에서 책을 검수하는 상황을 떠올려 보자. 100권의 책이 들어온 상자가 있을 때, 모든 책을 하나하나 꺼내 확인하는 대신 무작위로 10권만 뽑아 검사한다고 하자. 만약 누군가 빈 상자를 보내려 했다면, 무작위 샘플링에서 빈 공간이 발견될 확률이 매우 높다. 샘플링 횟수를 늘릴수록 속이기는 더 어려워진다. PeerDAS는 이 원리를 암호학적으로 구현하여, 일부 데이터만 확인해도 전체 데이터가 존재함을 수학적으로 확신할 수 있게 한다.
DAS는 완전히 새로운 기술은 아니다. 약간의 기술적 차이는 존재하지만, 셀레스티아(Celestia), 어베일(Avail) 같은 외부 데이터 가용성 레이어들이 이미 이 기술을 사용하고 있으며, 일부 롤업들은 저렴한 데이터 비용을 위해 이더리움 대신 이러한 외부 솔루션을 선택하기도 했다. PeerDAS의 의미는 이 검증된 기술을 이더리움 프로토콜 자체에 내장한다는 점이다. 롤업이 데이터 가용성을 위해 외부 체인에 의존할 필요 없이, 이더리움 자체의 보안을 그대로 상속받으면서 확장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PeerDAS의 도입으로 각 노드는 전체 데이터의 약 1/8만 저장하면서도 네트워크 전체의 데이터 가용성을 검증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노드 운영자의 부담을 크게 줄이면서도 블롭 처리량을 확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다. 향후 파라미터 조정을 통해 노드당 보관 비율을 1/16, 1/32까지 낮출 수 있어 추가적인 확장 여지도 열려 있다.
실질적인 영향은 L2 사용자들의 지갑에서 체감될 것이다. 블롭 처리량이 늘어나면 L2 롤업이 지불해야 하는 데이터 게시 비용이 감소하고, 이는 곧 L2 트랜잭션 수수료 인하로 이어진다. 일부는 후사카와 2.2에서 설명할 BPO 포크의 조합으로 L2 데이터 수수료가 평균적으로는 15~40%, 블롭의 수요가 급증할 경우 최대 60%까지 감소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스마트폰 앱에 새로운 기능이 필요하면 앱스토어를 통해 업데이트를 배포하고, 사용자는 클릭 한 번으로 최신 버전을 설치한다. 하지만 이더리움과 같은 탈중앙화 블록체인에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수천 개의 독립적인 노드가 동일한 규칙에 동의해야 하므로, 작은 변경 사항 하나도 모든 노드가 미리 정해진 시점 전에 소프트웨어를 업그레이드해야 하는 하드포크를 필요로 한다.
문제는 이러한 업그레이드가 많은 변경 사항을 포함하고, 광범위한 테스트가 필요하다면, 그만큼 노드가 조율하고 네트워크에 최종적으로 반영이 되는데에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점이다. L2 롤업들의 데이터 수요는 빠르게 증가하는데, 이더리움이 다음 대규모 포크를 기다려야만 블롭 용량을 늘릴 수 있는 상황이라면, 이 수요는 충족시키기 어려우므로 롤업들의 서비스 수준이 낮아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EIP-7892로 도입된 Blob Parameter Only(BPO) 포크는 이 딜레마를 해결한다. BPO 포크는 블롭 용량과 관련된 설정값만 수정하는 경량화된 업그레이드다. 전통적인 하드포크가 광범위한 프로토콜 변경과 수천 줄의 코드 구현을 필요로 하는 반면, BPO 포크는 클라이언트 설정 변경만으로 블롭 용량을 조정할 수 있게 한다.
후사카 이후 계획된 BPO 일정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BPO: 2025년 12월 9일, 블록당 블롭 타겟을 6 → 10, 최대값 9 → 15
두 번째 BPO: 2026년 1월 7일, 블록당 블롭 타겟 10 → 14, 최대값 15 → 21
BPO 포크는 L2 프로젝트들에게 예측 가능성을 제공한다. 구조화된 BPO 프레임워크는 롤업들이 이더리움의 확장 계획을 신뢰하고, 외부 데이터 가용성 솔루션 대신 이더리움에 전념할 수 있는 확신을 줄 수 있다.
이더리움 블롭 시장의 핵심은 블롭 수수료가 수요와 공급에 따라 자동으로 조정된다는 점이다. 블록이 블롭으로 가득 차면 수수료가 오르고, 사용이 적으면 내려가는 구조다. 일반적인 가스 수수료와 마찬가지로, 시장 메커니즘을 통해 블롭 사용량을 효율적으로 조정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 운용 과정에서 블롭 수수료 시장은 예상과는 다르게 동작했다. 이론적으로는 블롭 가격이 오르면 롤업들이 사용을 줄이고, 그러면 가격이 다시 내려가는 피드백 루프가 작동해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블롭 가격이 상당히 올라가도 롤업들이 사용량을 줄이는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블롭 가격이 특정 수준 아래로 떨어지면, 블롭 트랜잭션에 드는 실행 비용이 블롭 수수료 자체보다 훨씬 커지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이더리움의 기본 트랜잭션 비용은 수요가 낮을 때에도 몇 백원 수준인 반면, 블롭의 기본 비용은 거의 0원에 가까울 수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블롭 사용량이 한 시간 넘게 포화 상태에 달해도 총비용 관점에서 체감되는 증가가 크지 않다는 문제가 있었다.
EIP-7918은 블롭 수수료가 이더리움의 기본 트랜잭션 수수료의 16분의 1 아래로 내려가지 못하도록 계산식을 수정, 최소 가격(Reserve Price)를 갖게 만들어 이러한 문제를 해소하고자 하는 제안이다.
Source: Ranker
차선이 많은 도로가 항상 좋은 것은 아니다. 대형 트럭이나 긴 화물차가 여러 차로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경우, 오히려 차선이 많은 도로가 더 막힐 수도 있다. 도로의 처리량을 결정하는 요인에는 단순 차선 뿐만 아니라 차량 크기의 제한, 그리고 진입 규칙 등도 포함될 것이다.
이더리움의 가스 리밋도 마찬가지다. 가스 리밋은 블록당 처리할 수 있는 연산량을 결정한다. 더 높은 가스 리밋은 더 많은 트랜잭션을 의미하지만, 네트워크 보안과 안정성을 위협할 수 있는 위험도 함께 증가한다.
후사카는 이 균형을 맞추기 위해 세 가지 변경을 함께 도입한다.
처리량 증가: EIP-7935는 이더리움의 기본 가스 리밋을 60M으로 상향한다. 이는 2022년 더 머지 이후 30M에서 시작하여 점진적으로 증가해온 연장선상에 있다. 개발팀은 합성 트랜잭션으로 블록을 가득 채우는 스트레스 테스트를 통해 60M의 안전성을 검증했다.
단일 트랜잭션 제한: EIP-7825는 트랜잭션당 가스 사용량 상한을 약 1,678만 가스로 설정한다. 이전에는 단일 트랜잭션이 전체 블록 가스를 소비할 수 있었는데, 이는 네트워크 공격 위험을 높이고 다른 트랜잭션의 처리를 방해했다. 새로운 상한은 대부분의 정상적인 트랜잭션에는 충분하면서도, 한 트랜잭션이 블록을 독점하는 것을 방지한다.
블록 크기 제한: EIP-7934는 블록의 물리적 크기에 10MiB 상한을 설정한다. 가스는 연산량을 측정하지만 데이터 크기를 직접 제한하지는 않는다. 너무 큰 블록은 네트워크를 통해 전파되기 어렵고, 일부 노드에서는 보이고 다른 노드에서는 누락되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이 제한으로 모든 노드가 일관되게 블록을 처리할 수 있게 된다.
이 세 가지 변경의 조합으로 이더리움은 처리량을 늘리면서도 네트워크 안정성을 유지한다. 60M 가스 리밋은 L1에서 더 많은 트랜잭션과 복잡한 스마트 컨트랙트 실행을 가능하게 하고, 트랜잭션과 블록에 대한 제한은 악의적인 사용이나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네트워크가 정상 작동하도록 보장한다.
장기적으로 이 변경들은 이더리움의 병렬 실행 전환을 위한 기반이 된다. 트랜잭션 당 가스 상한은 여러 트랜잭션을 동시에 처리하는 병렬 실행 환경에서 더욱 중요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 스마트폰에는 애플의 시큐어 앙클레이브(Secure Enclave)나 안드로이드의 키스토어(Keystore)와 같은 보안 칩이 내장되어 있다. 이 칩들은 Face ID, 지문 인식, 패스키(Passkey) 같은 보안 기능에 사용되며, 업계 표준인 secp256r1 암호화 곡선을 사용한다.
하지만 이더리움은 이들과 호환되지 않는 secp256k1 곡선을 사용해 서명하며, 이러한 칩들과 호환되지 않는다. 이 배경에는 비트코인 초기에 사토시 나카모토는 NIST가 표준화한 곡선에 NSA의 백도어가 있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당시 거의 사용되지 않던 secp256k1을 선택했고, 이더리움도 이를 따랐다는 것이 있다.
현재도 Trust Wallet의 Barz, Safe의 패스키 모듈 등 일부는 패스키나 Face ID를 사용하고 있다. 이들은 계정 추상화(Account Abstraction)를 활용한 스마트 컨트랙트 지갑으로, 컨트랙트 내부에서 secp256r1 서명을 검증하는 로직을 구현한다. 하지만 이더리움 L1에서 이 검증을 수행하려면 20만~33만 가스가 소비되며, 이는 일반 트랜잭션의 기본 비용(21,000 가스)의 10배가 넘는 수준이다. 일부 L2에서는 RIP-7212 프리컴파일을 도입하여 이 비용을 3,450 가스로 낮췄지만, 이더리움 L1에는 이를 위한 최적화 과정이 부재했다.
EIP-7951은 이더리움 L1에 secp256r1 검증을 위한 프리컴파일을 도입한다. 프리컴파일은 자주 사용되는 연산을 네트워크에 내장하여 훨씬 저렴하게 실행할 수 있게 하는 기능이다. 이 프리컴파일로 L1에서의 검증 비용이 6,900 가스로 떨어지며, 이는 기존 대비 약 50배의 비용 절감이다. 결과적으로 후사카 업그레이드 이후, 패스키 기반 지갑은 L1에서도 경제적으로 실용적인 선택지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Source: Tenor
이더리움에서 트랜잭션을 보내면, 해당 트랜잭션이 블록에 포함되어 확정될 때까지 약 12초(슬롯 시간)를 기다려야 한다. 사용자 경험 측면에서 이 12초는 매우 길게 느껴진다.
만약 어떤 검증자가 "당신의 트랜잭션을 반드시 다음 블록에 포함시키겠다"고 미리 약속할 수 있다면? 사용자는 블록이 실제로 생성되기 전에도 지갑이나 앱에서 트랜잭션이 "즉시 확정"된 것처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프리컨펌(preconfirmation)'의 개념이다.
프리컨펌이 작동하려면 한 가지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누가 다음 블록의 제안자(proposer)가 될지 미리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후사카 이전에는 비콘 체인의 제안자 스케줄이 완전히 결정론적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블록 제안자는 두가지 요소를 기반으로 정해지는데, 하나는 RANDAO라는 시드값, 다른 하나는 검증자의 스테이킹 잔액이다. 그러나 스테이킹 잔액은 보상, 패널티, 추가 예치 등으로 인해 수시로 바뀔 수 있으며, 이로 인해 제안자 스케줄은 완전한 예측이 어려웠다. 특히 펙트라 업그레이드로 검증자당 최대 스테이킹 한도가 32 ETH에서 2,048 ETH로 늘어나면서, 잔액 변동 폭이 커져 예측은 더 어려워졌다.
EIP-7917은 각 에포크 시작 시점에, 향후 몇 에포크 동안의 블록 제안자 명단을 미리 계산해서 비콘 체인에 저장하도록 한다. 이는 검증자들의 스테이킹 잔액 변경으로 인해 다음 에포크의 제안자 스케줄이 변동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더 중요한 것은, 이 EIP가 다음 에폭의 제안자 스케줄을 비콘 루트와 간단한 머클 증명을 통해 애플리케이션 레이어에서 접근 가능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이는 온체인 프리컨펌 프로토콜의 구현을 크게 단순화할 것이며, 프리컨펌이 핵심적인 기능을 하는 타이코(Taiko)와 같은 베이스드 롤업(Based Rollup)들이 직접적인 수혜자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3.4.1 MODEXP 최적화와 보안 강화
이더리움에는 MODEXP라는 프리컴파일(내장 함수)가 존재한다. MODEXP는 지수 연산 결과에 모듈러(정수로 나눴을 때 나머지) 값을 계산하는 함수로, RSA 서명 검증이나 증명 시스템에 사용되는 대용량 수학 연산을 할때 주로 사용된다. 문제는 MODEXP가 입력 인자의 길이를 무제한으로 두었기에, 비정상적으로 큰 인자값이 들어올 경우 버그를 발생시킬 가능성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EIP-7823은 이를 해소하기 위해 MODEXP 프리컴파일의 입력에 1,024 바이트의 상한선을 정하자는 제안이다. 이에 더해, MODEXP가 특정 케이스에서 가스비가 과도하게 낮게 책정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최소 요금을 인상하고, 엣지 케이스에 대한 가스비를 상향 조정했다.
3.4.2 히스토리 만료와 네트워크 최적화
이더리움은 2015년 이후 모든 거래 기록이 쌓이며, 노드 하나를 운영하려면 1TB가 넘는 저장 공간이 필요해졌다. 새로운 노드가 네트워크에 참여하려면 이 모든 데이터를 다운로드해야 하는데, 이는 충분한 성능을 갖춘 전문 노드 운영자가 아닌 일반 홈 노드 운영자가 새로이 참여하기에 시간적/하드웨어적 부담으로 다가올 수 있었다.
EIP-7642, 일명 eth/69는 이더리움 클라이언트들은 '부분적 히스토리 만료'를 지원, 2022년 9월 더 머지(The Merge) 이전의 오래된 블록 데이터를 노드에서 삭제해도 되도록 허용한다. 이는 노드당 300~500GB의 저장 공간을 절약할 수 있도록 만들었으며, 2TB 정도의 저장장치로도 이더리움 노드를 편하게 운영할 수 있게 한다. 과거 데이터에 대해서는 토렌트 / 기관 제공자의 아카이브 노드 등을 통해 접근할 수 있도록 한다.
또한 eth/69는 영수증(Receipt)에서 Bloom 필터를 제거하여 동기화 효율을 대폭 개선한다. 기존에는 어떤 클라이언트도 Bloom 필터를 실제로 저장하지 않으면서도 네트워크 프로토콜 규격상 이를 전송해야 했다. 이로 인해 새 노드가 동기화할 때마다 약 530GB(압축 시 약 95GB)의 불필요한 데이터가 오갔는데, eth/69는 이 필드를 프로토콜에서 완전히 제거함으로써 서빙 노드의 CPU 부하와 네트워크 대역폭을 동시에 절감한다.
마지막으로, 새로운 BlockRangeUpdate 메시지를 통해 피어 간 블록 보유 현황을 실시간으로 공유할 수 있게 된다. 각 노드는 자신이 보유한 블록 범위가 변경될 때 이를 주변 피어에게 알리며, 트래픽 절감을 위해 32블록(1 에포크)당 최대 한 번만 전송한다. 이를 통해 동기화를 원하는 클라이언트는 어떤 피어가 필요한 블록을 가지고 있는지 미리 파악할 수 있어, 불필요한 요청 시도 없이 효율적으로 데이터를 받아올 수 있다.
블록체인 업계에서는 종종 "이더리움 킬러"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더 빠르고, 더 저렴하고, 더 새로운 체인이 이더리움을 대체할 것이라는 서사다. 그러나 이더리움은 킬러들의 등장과 퇴장을 여러 차례 지켜보면서도 여전히 가장 많은 개발자, 가장 많은 TVL, 가장 많은 실사용 사례를 보유한 스마트 컨트랙트 플랫폼으로 남아 있다.
그 비결은 아마도 점진적이면서도, 모든 것이 의미를 갖는 진화에 있을 것이다. 이더리움은 한 번에 모든 것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더 머지로 합의 메커니즘을 바꾸고, 덴쿤으로 블롭을 도입하고, 펙트라로 계정 추상화를 추가하고, 후사카로 데이터 가용성을 확장하는 과정이 느리게 보일지 몰라도, 각각은 생태계에 분명한 임팩트를 남겨왔다.
이더리움과 같이 수천 개의 노드가 동기화해야 하는 탈중앙화 네트워크에서, 7개월 만에 12개의 업데이트를 조율해 메인넷에 적용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 느리고 신중한 과정이 때로는 답답해 보일 수 있지만, 바로 그 과정이 이더리움을 이더리움답게 만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