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립토 평판 시스템은 중세 수준의 파편화에 머물러 있다. 10개 이상의 평판 프로토콜이 서로 다른 데이터를 서로 다른 기준으로 측정하고 있지만, 이들 간에 공유되는 표준은 없다. 그 결과 프로젝트마다 시빌 탐지 파이프라인을 처음부터 구축해야 하며, 평판은 생태계 경계를 넘지 못한 채 일회성 비용으로 소모되고 있다.
평판이 경제적 변수로 기능하려면, 서로 다른 VM의 데이터를 하나의 실행 환경에서 조합하고 검증할 수 있는 인프라가 필요하다. 플루언트의 블렌디드 실행 환경(EVM·SVM·Wasm 통합)은 기존의 세가지 한계를 동시에 해소할 수 있는 기술적 토대를 제공한다.
에이전트 평판, 큐레이터 평판 등 실질적 유즈케이스가 통합 평판 인프라를 요구하는 상황 아래 있다. 현실과 필요 사이의 격차는 평판이 어플리케이션 수준의 기능을 넘어 생태계 전체의 공유 인프라로 진화해야 할 필요성을 보여준다.
Source: todorbozhinov.com
11세기 지중해의 마그레비 무역상은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시칠리아의 대리인에게 상품을 위탁해야 했다. 국경을 넘어 강제할 사법 체계도, 계약 이행을 담보할 중앙 권위도 없는 상황에서, 이들은 어떻게 서로를 신뢰했을까?
경제학자들이 밝혀낸 이들의 해법은 다자간 평판 연합이었다. 대리인이 단 한 명의 상인이라도 속이면, 그 사실이 편지 네트워크를 통해 지중해 전역에 전파되었고, 배신의 낙인이 찍힌 대리인은 연합 내 모든 거래 기회를 박탈당했다.
그러나 이 시스템의 평판은 본질적으로 단편적이었다. 편지 네트워크가 추적한 것은 "이 대리인이 정직한가, 아닌가"라는 단일 차원의 정보뿐이었다. 누가 어떤 상품의 교역에 전문성을 가졌는지, 분쟁이 발생했을 때 어떻게 해결했는지, 새로운 교역로를 개척한 이력이 있는지와 같은 다층적 정보는 평판의 대상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 연합은 구성원이 서로를 인식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작은 네트워크에서만 작동했기에, 교역 규모가 커지고 참여자의 배경이 다양해지면서 한계에 부딪혔다.
12~13세기 프랑스의 샹파뉴 대시장은 한 단계 진화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곳에 도입된 "법상인(Law Merchant)" 제도는 거래자의 행동 기록을 체계적으로 관리했다. 누구와 거래했는지, 어떤 분쟁이 있었고 어떻게 해결되었는지가 기록되었으며, 상인들은 거래 전에 상대의 이력을 조회할 수 있었다. 마그레비 연합의 이분법적 평판에 비하면 훨씬 다층적인 정보가 관리된 셈이다.
그러나 법상인의 기록부에도 근본적 한계가 있었다. 그것은 샹파뉴라는 특정 시장에 종속된 평판이었다는 점이다. 한 상인이 샹파뉴에서 수십 년간 축적한 거래 이력과 분쟁 해결의 신뢰는, 다른 시장으로 건너가는 순간 사실상 무에서 다시 시작해야 했다. 평판은 기록되었지만 이식되지 못했다.
이러한 문제들은 근대에 공증 제도, 상업 등기, 그리고 결정적으로 신용 기관이 등장하며 극복될 수 있었다. FICO는 개인의 금융 이력이라는 다층적 정보를 하나의 점수로 종합하고, 이 점수를 기관 간에 이식 가능하게 만들었으며, 사회보장번호와 같은 신원 확인 장치 위에서 작동하도록 설계되었다.
평판이 특정 관계나 특정 시장의 범위를 넘어, 인프라 수준으로 진화하며 문제가 해소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크립토 생태계에서의 평판 시스템은 어떤 형태로 구현되고 있을까?
크립토 생태계는 법적 강제력을 갖는 보편적 신원 체계가 존재하지 않으며, 설령 이를 도입하고자 하더라도 하나의 온체인 주소 뒤에는 수많은 국가에 속한 서로 다른 법적 신원이 위치해 있고, 그 주소가 인간의 것인지 봇의 것인지조차 특정할 수 없다. 기존의 제도적 토대를 그대로 가져올 수 없는 환경에서, 같은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풀어야 하는 것이 크립토 평판 인프라의 근본적 과제다.
크립토 생태계에서 평판을 측정하고자한 시도 자체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지난 수년간 다양한 프로토콜이 사용자의 신뢰도를 수치화하려 해왔으며, 이를 활용해 프로젝트의 에어드랍이나 토큰 프리세일 할당 가중치 부여 등 내부 커뮤니티를 식별하려는 다양한 시도가 있어왔다. 각 프로젝트가 수집하는 데이터를 기준으로 분류해보면 아래와 같이 나타낼 수 있다.
2.1.1 소셜 활동 기반
카이토(Kaito): AI 엔진으로 X 게시물의 독창성·영향력을 분석해 "얍스(Yaps)" 점수를 산출, 사용자의 소셜 영향력을 나타내는 지표로 사용했다. (현재는 X의 인센티브 포스팅 금지 정책에 따라 선별적 크리에이터 마케팅 플랫폼인 Kaito Studio로 전환 중이다)
모니(Moni): AI를 기반으로 사용자의 X 활동 기간과 게시물을 분석해 점수를 매긴다.
갤즈(Galxe): 프로젝트별 퀘스트 완료 기록을 축적해 자체적인 점수(Galxe Passport Score)를 산출한다.
탤런트 프로토콜(Talent Protocol): 깃허브(GitHub) 커밋, 링크드인(LinkedIn) 이력 등 빌더 활동을 기반으로 빌더 스코어를 산출한다.
2.1.2 피어 투 피어 보증 기반
에토스(Ethos): 사용자 간 리뷰·보증(vouch)·슬래싱을 통해 일종의 신용 점수를 산출한다. 초대 기반 시스템으로 시빌 저항성을 확보하고, 보증자의 평판이 피보증자에게 연결되는 바인딩 설계로 책임이 연쇄되는 신뢰 네트워크를 구축한다.
2.1.3 온체인 활동 기반
디젠스코어(DegenScore): 이더리움 디파이·NFT 활동 이력만으로 숙련도를 측정, 700점 이상 사용자에게 양도 불가능한 소울바운드 토큰(Beacon)을 발행한다.
노미스(Nomis): 30개 이상의 파라미터(잔액, 트랜잭션 볼륨, 지갑 연령 등)를 수학 모델로 분석해 0~100점의 평판 점수를 산출하고, 이를 소울바운드 토큰으로 민팅한다.
페어스케일(FairScale): AI 기반으로 온체인·오프체인 지표를 결합해 사용자에 대한 점수를 산출한다.
디뱅크(DeBank): 신원 인증·자산 증명·플랫폼 행동·사용자 관계·부정 행위의 다섯 차원으로 종합적인 신용 점수를 산출한다. 다수(320만)의 사용자를 기반으로 포트폴리오 추적과 평판을 결합하는 독자적 위치를 구축하고 있다.
2.1.4 신원 증명 기반
휴먼 패스포트(Human Passport, 전 Gitcoin Passport): 봇과 인간을 구분하기 위한 수단으로, 구글·깃허브·정부 발급 ID 등 사용자로부터 다양한 정보를 수집해 점수를 산출한다.
이렇듯 현재 크립토 생태계에는 최소 10개 이상의 평판을 점수화해 활용하고자 하는 프로토콜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 다른 데이터를 서로 다른 맥락에서 수집하며, 별도의 통합된 기준을 공유하지 않는다. 약간의 비약을 섞어 말하자면, 현재의 크립토 생태계에서의 평판 시스템은 서론에서 언급한 중세 시대의 무역상 정도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할 수 있다.
2.1절에서 살펴본 평판 프로토콜들은 각각 의미 있는 신호를 포착하고 있다. 그러나 프로젝트가 실제로 "누구에게 토큰을 배분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 이 프로토콜들의 파편화는 단순한 불편을 넘어 구조적 비용을 발생시킨다.
첫째, 기준의 불일치가 평판의 소모적 재측정을 강제한다. 평판 프로토콜은 통상적으로 에어드랍이나 토큰 프리세일의 할당량을 결정할 때 참조되는 지표로 기능한다. 그러나 각 프로토콜이 "좋은 사용자"를 정의하는 기준은 서로 다르며, 토큰을 배분하는 프로젝트 역시 자신만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문제로 작용한다. 어떤 프로젝트에게 "좋은 사용자"란 기술적 기여를 할 수 있는 개발자이고, 다른 프로젝트에게는 장기적으로 커뮤니티에 머무를 홀더이며, 또 다른 프로젝트에게는 생태계 외부로 영향력을 확산시킬 수 있는 인플루언서다. 기존 평판 프로토콜 중 어느 것도 이 다양한 맥락을 동시에 충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프로젝트들은 결국 독자적인 기준을 설계하는 선택을 하게 된다.
그 결과, 거의 모든 프로젝트가 "누가 진짜인가"를 판단하는 파이프라인을 처음부터 구축하고 있다. 모나드의 경우 소셜 영향력을 가진 CT 플레이어를 선별하기 위해 장기간에 걸쳐 전체 계정에 대한 리뷰를 거쳤으며, 메가이더는 온체인 활동 이력에 대해 자체 기준을 설계해 점수를 매겼다. 이 과정에서 투입되는 비용은 일회적이며, 프로젝트 간에 재사용될 수 없는 자료로 소모된다.
둘째, 온체인에 제출되지 않는 데이터는 근본적으로 검증이 불가능하다. 현재 평판 프로토콜들이 참조하는 데이터의 상당 부분은 오프체인에 존재한다. 카이토가 측정하는 X의 소셜 활동, 탤런트 프로토콜이 참조하는 깃허브 커밋 등이 그러하다. 이 데이터들은 각 플랫폼의 API를 통해 수집되지만, 그 진위를 독립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온체인 메커니즘은 존재하지 않는다. X에서의 영향력이 봇 네트워크에 의해 부풀려진 것인지, 깃허브 커밋이 실질적 기여인지 형식적 활동인지를 온체인에서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뜻이다.
셋째, 평판이 생태계 경계를 넘지 못한다. 한 사용자가 이더리움 생태계에서 수년간 디파이 활동을 통해 축적한 온체인 이력은, 솔라나 생태계에서는 통상적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한 플랫폼에서 높은 평판을 쌓았더라도 다른 플랫폼의 토큰 세일에서는 백지 상태에서 다시 평가받아야 하는 것이다.
이 세 문제는 독립적이지 않다. 평판이 생태계 간에 이식되지 않기 때문에 프로젝트마다 독자적 기준을 만들어야 하고, 독자적으로 만든 기준은 검증 가능한 온체인 데이터만으로는 충분한 맥락을 구성하지 못해 검증 불가능한 오프체인 데이터에 의존하게 되며, 그 결과 조작에 취약해진다. 파편화는 단순한 불편이 아니라, 크립토 생태계 전체의 신뢰 비용을 구조적으로 높이는 악순환의 고리다.
이러한 악순환을 끊으려면, 다양한 맥락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복합 평판 체계, 오프체인 데이터를 검증 가능한 형태로 정착시키는 증명 메커니즘, 그리고 서로 다른 실행 환경의 데이터를 하나의 레이어에서 통합하는 크로스체인 호환성이 필요하다. 기존의 접근법은 이 세 요구를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을까?
가장 직관적인 해법은 오프체인 서버에서 여러 체인의 데이터를 읽어 집계한 뒤, 결과만 온체인에 기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델에는 두 가지 근본적 한계가 있다.
첫째는 컴포저빌리티의 부재다. 오프체인에서 산출된 평판 점수를 온체인 프로토콜이 참조하려면, 오라클을 통해 해당 점수를 가져와야 한다. 이때 대출 프로토콜이 담보율을 결정하는 시점에 오라클의 정직성에 의존하게 되며, 오라클 업데이트 지연 사이에 발생하는 시간 차이는 악용 가능한 틈이 된다. 반면, 평판 로직이 같은 실행 환경에 존재한다면 같은 트랜잭션 안에서 평판 컨트랙트를 직접 호출할 수 있고, 이때의 신뢰 보장은 실행 환경 자체가 제공한다.
둘째는 검열 저항성의 결여다. 오프체인 집계자는 특정 사용자의 평판을 자의적으로 조작하거나 배제할 수 있으며, 그 과정을 외부에서 검증할 수 없다. 평판이 경제적 변수로 기능하려면 (대출 금리를 결정하고, 거버넌스 가중치를 부여하는 등), 그 산출 과정 자체가 검증 가능해야 한다.
그 다음으로는 레이어제로 등 크로스체인 메시징 프로토콜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데이터의 전송에 초점이 맞춰진 프로토콜이며, 데이터의 통합 실행에 중점을 둔 도구가 아니다. 크로스체인 메시징 프로토콜을 통해 체인 A의 평판 점수를 체인 B로 보낼 수는 있지만, 체인 A의 EVM 컨트랙트가 산출한 점수와 체인 B의 SVM 컨트랙트가 산출한 점수를 같은 실행 환경 안에서 조합하여 하나의 복합 평판으로 연산하는 것은 이 프로토콜의 설계 범위를 넘어선다.
마지막으로는 어테스테이션 프로토콜을 고려할 수 있다. 이더리움 어테스테이션 서비스(EAS)는 "누구든 온체인에서 무엇이든 증명(attest)할 수 있는" 범용 프리미티브를 제공하며, 이를 기반으로 평판 데이터를 온체인에 기록하고 플랫폼 간에 호환시키는 구조가 이미 실험되고 있다. 그러나 EAS를 포함한 현재의 어테스테이션 프로토콜은 단일 VM 생태계에서 가장 강력하게 작동한다. 솔라나의 SVM에서 발생한 활동을 이더리움의 EAS에 기록할 수는 있지만, 이 과정에서 원본 데이터의 무결성은 오프체인 오라클에 의존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크립토 생태계에서의 평판의 경제적 가치를 온전히 살리며 활용할 수 있는 환경을 인프라 수준에서 구축하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VM의 로직을 하나의 실행 컨텍스트에서 구동할 수 있는 레이어가 필요하다. 플루언트의 블렌디드 실행 환경은 이 요구에 정합하는 기술적 토대를 갖추고 있으며, 다음 절에서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Source: Fluent
플루언트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EVM, SVM, 그리고 Wasm 기반 어플리케이션을 하나의 통합 실행 환경에서 구동시킬 수 있는 "블렌디드 실행(blended execution)" 환경이다.
플루언트는 영지식 증명에 최적화된 Wasm 변형인 rWasm을 기반으로, EVM과 SVM의 동작을 시뮬레이션한 뒤 하나의 통일된 상태 전이 함수로 컴파일할 수 있다. 서로 다른 VM의 스마트 컨트랙트가 브릿지 없이 동일 상태를 공유하며 원자적으로 상호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 기존 멀티체인 솔루션과의 근본적 차이다.
이 아키텍처가 평판 인프라와 맞닿는 지점은 명확하다. 서로 다른 평판 프로토콜들이 측정한 데이터를 하나의 복합 평판으로 엮으려면, 서로 다른 실행 환경의 데이터를 동일 컨텍스트 안에서 읽고 조합하고 증명할 수 있는 레이어가 필요하다. 블렌디드 실행 환경은 바로 그 역할을 수행할 기반을 제공한다. 예를 들어, 솔리디티(Solidity)로 작성된 EVM 기반 평판 컨트랙트가 러스트(Rust)로 구현된 Wasm 분석 엔진을 호출하고, 그 결과를 SVM 어플리케이션에서 참조하는 환경을 구축할 수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이러한 블렌디드 실행 환경이 제공할 수 있는 가치는 아래의 세가지로 대표될 수 있다.
복합 평판의 실현: 한 사용자의 소셜 미디어 활동, 피어 보증, 온체인 트랜잭션 이력, 그리고 인간성 증명을 플루언트의 단일 실행 환경 안에서 조합할 수 있다. 각 데이터 소스를 독립적으로 검증하되, 최종적으로 하나의 통합 평판 프로필로 렌더링하는 것이다.
영지식 증명 기반의 선택적 공개: rWasm의 영지식 증명 최적화 설계는 사용자의 특정 행적에 대한 사실 여부만을 증명하되, 구체적 트랜잭션 내역은 공개하지 않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사용자는 자신의 평판에서 필요한 부분만 선택적으로 증명하고, 나머지는 보호할 수 있다.
크로스 생태계 이식성: 플루언트가 EVM, SVM, Wasm을 모두 지원한다는 것은, 이 위에 구축된 평판 데이터가 이더리움 생태계에서 구축되었든 솔라나 생태계에서 구축되었든 동일한 환경 안에서 인식되고 활용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3.2.1 Prints
플루언트가 공개한 "Prints"는 사용자의 X 계정, 온체인 지갑 등 다양한 소스를 연결하여 고유한 소셜 풋프린트를 생성하는 제품이다.
Prints 그 자체는 기존 프로필 집계 서비스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독립 어플리케이션이 아니라 블렌디드 실행 환경 위에서 작동한다는 점이, 현재의 기능과 미래의 가능성 사이에 경로를 만든다. Prints가 단일 점수가 아닌 "맥락적 신호의 컨테이너"로 설계되었다면, 그 위에서 평판은 점수(score)가 아니라 맥락과 시간과 반복된 행동으로 형성되는 신호의 다발(bundle of signals)로 기능할 수 있다.
3.2.2 Fluent Connect
Prints가 사용자 측의 평판 프리미티브라면, 플루언트 커넥트(Fluent Connect)는 빌더 측의 인터페이스다. 기존 크립토 프로젝트의 사용자 확보 전략은 디스코드 멤버 수, 팔로워 수, 트랜잭션 횟수 같은 양적 지표에 의존해왔으며, 이것이 시빌과 봇이 번성할 환경을 조성했다. 플루언트 커넥트는 빌더가 사용자의 평판 프로필을 기준으로 자신의 프로덕트에 높은 적합도를 보이는 사용자를 식별할 수 있게 설계되었다.
플루언트 커넥트 위에 구축된 베나 파이낸스(Vena Finance)는 이러한 방향의 초기 실험을 제공하고 있다. 기존 디파이가 모든 사용자에게 획일적 담보율을 적용하는 데 반해, 베나 프로토콜은 "평판 가중 금리(reputation-weighted rates)"라는 개념을 도입해 사용자의 Prints 평판에 따라 자본의 가격을 차등 적용하는 모델을 설계하고 있다. 아직 개념 검증 단계이지만, 평판이 프로필 장식이 아닌 경제적 변수로 기능하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한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Source: @blendino
플루언트가 공개한 로드맵은 평판 인프라가 어떻게 진화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현재 단계에서는 플루언트 커넥트(Fluent Connect)를 통해 사용자가 평판을 구축하고 빌더가 진짜 사용자를 발견하는 기반을 마련한다. 이것은 전체 시스템의 콜드 스타트 문제를 해결하는 단계로, 평판 데이터의 초기 축적과 검증이 이루어지는 시기다.
다음 단계에서 생태계가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평판 기반 우대 금리 대출, 신용 평가 및 선구매 후결제, P2P 마켓플레이스, 소셜 앱이 Prints와 플루언트 커넥트를 통합하면서 "신뢰받는 활동에 보상하는" 구조가 형성된다. 빌더들에게는 로그인 템플릿, 앱 및 사용자 분석, AI MCP 등의 개발자 도구가 제공되어 Prints 데이터를 자체 프로덕트에 쉽게 통합할 수 있게 된다.
장기 단계는 가장 야심적이다. 저담보 대출, 거버넌스, 안티시빌 게임이 평판 레이어 위에서 작동하는 생태계를 그린다. 여기서 평판은 단순히 접근 권한을 부여하는 필터가 아니라, 새로운 역할과 권한을 해제하는 열쇠로 기능한다. 크립토의 오랜 숙원이었던 저담보 대출이 특히 눈에 띈다. 전통 금융에서 신용 점수가 담보 없이도 대출을 가능케 하듯, 온체인 평판이 충분히 축적되고 검증되면 과잉 담보 없이도 자본 효율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다.
이 로드맵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Prints, API와 오라클 서비스, 소프트웨어 개발 도구로 구성되는 3계층 인프라 스택이다. 가장 하단에 위치한 Prints가 소셜 자본과 평판 데이터를 집계하는 레이어로 위치하고, 그 위의 API와 오라클 서비스가 외부 어플리케이션이 이 데이터를 참조할 수 있는 인터페이스를 제공하며, 최상위의 SDK가 빌더들의 통합 비용을 최소화한다. 평판이 개별 어플리케이션의 기능이 아닌, 생태계 전체의 공유 인프라로 설계되고 있는 것이다.
평판 생태계에 있어 플루언트는 분명 아직 초기 단계에 있다. 그러나 이 인프라가 성숙했을 때 열리는 가능성은, 평판이 단순한 프로필 장식이 아니라 온체인에서 실질적인 경제적 변수로 기능하는 시나리오들이다.
이번 섹션에서는 서로 다른 생태계에 흩어진 데이터를 하나의 실행 환경에서 조합하고 검증할 수 있는 능력을 요구하는, 필자가 생각하기에 블렌디드 실행 환경이 평판 인프라로써의 제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는 유즈케이스들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AI 에이전트가 온체인에서 자율적으로 거래하고 협업하는 환경이 빠르게 도래하고 있으며, 이러한 환경에서 "봇인가 아닌가"라는 이분법은 점점 실효성을 잃는다. 중요한 질문은 "이 에이전트는 인간인가?"가 아니라, "이 에이전트는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가?"다.
이 필요를 표준 수준에서 인식한 것이 ERC-8004다. 최근 이더리움 메인넷에 배포된 ERC-8004는 에이전트의 신원, 평판, 검증을 온체인에 기록하는 세 가지 레지스트리를 정의한다. 클라이언트 에이전트가 서버 에이전트에 대해 점수, 태그, 증거 URI를 기록하면, 다른 스마트 컨트랙트가 이 평판 데이터를 읽어 의사결정에 활용할 수 있는 구조다. 대출 프로토콜이 에이전트의 평판 점수를 참조해 리스크 프리미엄을 산정하거나, 작업 마켓플레이스가 에이전트 고용 여부를 결정하는 시나리오가 명시적으로 상정되어 있다.
ERC-8004는 크로스체인 환경에 대해서도 의미 있는 설계를 포함한다. 에이전트는 여러 체인에 동시에 등록할 수 있으며, 각 체인의 registration file에서 자신이 등록된 전체 레지스트리 목록을 상호 참조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레퓨테이션의 발견과 조회는 이미 크로스체인으로 작동한다.
그러나 에이전트의 활동이 여러 체인에 분산되어 있는 현실을 고려할 때, 발견 가능성과 경제적 활용 사이에는 여전히 간극이 존재한다.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를 생각해보자.
에이전트 A가 이더리움의 몰포에서 12개월간 큐레이팅한 볼트의 퍼포먼스 데이터, 솔라나의 카미노에서 축적한 리스크 관리 이력, 그리고 베이스에서 수행한 태스크에 대한 클라이언트 피드백이 있다고 가정하자. ERC-8004의 현재 설계에서는 이 세 가지 데이터가 각각의 체인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registration file의 상호 참조를 통해 외부 시스템이 이를 조회할 수 있다.
하지만 대출 프로토콜이 이 에이전트에게 특정 담보비율을 동적으로 적용하려면, 세 가지 데이터를 하나의 트랜잭션 내에서 읽고, 가중치를 부여하여 결합하고, 그 결과를 같은 트랜잭션에서 대출 로직에 직접 반영해야 한다. 이 과정이 오프체인 집계자를 경유하면, 컴포저빌리티와 검증 가능성의 문제가 발생한다.
이것은 ERC-8004의 결함이 아니다. ERC-8004는 "무엇을 기록할 것인가"에 대한 표준이며, 이 역할을 정확하게 수행하고 있다. 부족한 것은 기록된 데이터를 멀티체인 환경에서 실행 수준으로 통합할 수 있는 레이어이다. ERC-8004가 레퓨테이션의 문법(grammar)을 정의했다면, 필요한 것은 그 문법으로 쓰인 문장들을 하나의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는 실행환경이다.
플루언트의 블렌디드 실행환경은 이 간극을 메울 수 있는 아키텍처를 갖추고 있다. EVM, SVM, Wasm 기반 컨트랙트가 동일 실행환경에서 원자적으로 상호작용할 수 있으므로, 서로 다른 VM에서 축적된 에이전트 피드백 데이터를 같은 실행 컨텍스트 내에서 읽고, 결합하고, 증명하는 것이 기술적으로 가능하다. 이는 ERC-8004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ERC-8004가 정의한 데이터를 경제적으로 활용 가능한 형태로 만드는 상보적(complementary) 인프라로서의 역할이다.
현재 디파이 대출 시장 구조에서 큐레이터는 빠질 수 없는 존재다. 몰포(Morpho), 오일러(Euler) 등은 리스크 관리를 프로토콜 자체에서 볼트 단위로 분리, 이를 독립적인 전문가인 큐레이터에 위임하는 구조를 채택했다. 각 큐레이터는 유동성 볼트를 설계하고, 어떤 담보 자산을 수용할지, 어떤 시장에 자금을 배분할지를 결정하며, 그 성과에 따라 수수료를 받는다.
Source: Morpho
그런데 이 막대한 자산을 위탁받는 큐레이터의 신뢰성을 평가하는 방법은 놀라울 정도로 원시적이다. 몰포의 공식 문서조차 큐레이터 평가 기준으로 "X 계정을 팔로우하고 공개 채널을 검토하라", "변동성 높은 시기에도 소통하는지 확인하라" 등, 사용자의 수작업을 필요로 하는 사항들을 안내한다. 이러한 정보들을 한번에 수집해 평가 가능한, 검증 가능한 표준화된 평판 체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여기서 블렌디드 실행 환경의 필요성이 구체화된다. 주요 큐레이터들은 이미 여러 생태계에 걸쳐 활동하고 있다. 스테이크하우스(Steakhouse), Re7 Labs 등 대량의 유동성을 관리하는 큐레이터들은 이미 이더리움과 솔라나를 비롯한 멀티체인 환경에서의 볼트를 큐레이팅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큐레이터의 역량과 신뢰성을 온전히 평가하려면, 이더리움에서의 볼트 성과, 솔라나에서의 리스크 관리 이력, 극단적 시장 상황에서의 대응 기록이 하나의 프로필로 통합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는 이 데이터가 서로 다른 체인, 서로 다른 VM 위에 분산되어 있으며, 이를 하나의 검증 가능한 평판으로 엮는 인프라는 존재하지 않기에 블렌디드 실행 환경이 수행할 수 있는 역할이 남아있는 영역이다.
마그레비 상인의 편지 네트워크, 샹파뉴 대시장의 법상인, 근대 신용 기관의 FICO. 평판 시스템의 역사를 관통하는 진화의 방향은 일관된다. 단편적 정보에서 다층적 정보로, 특정 시장에 종속된 평판에서 이식 가능한 평판으로, 그리고 신원의 불확실성을 해소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크립토 생태계의 평판 시스템도 이와 같은 진화를 필요로 할 것이다. 카이토, 디젠스코어, 갤즈 등 기존 평판 프로토콜들은 시빌을 걸러내고 진성 사용자를 식별하려는 시장의 근본적 수요를 입증했으며, 에어드랍 할당과 커뮤니티 큐레이션의 기본 도구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이들이 만들어낸 임팩트는 각자의 생태계 안에 갇혀 있었고, 프로젝트마다 파이프라인을 재구축해야 하는 비용 구조를 바꾸지는 못했다. 플루언트가 노리는 것은 바로 이 지점으로, 개별 프로토콜이 증명한 평판의 경제적 가치를 블렌디드 실행 환경 위에서 통합·검증·이식 가능하게 만듦으로써 평판을 어플리케이션 수준의 기능에서 생태계 공유 인프라로 격상시키는 것이다.
진짜 사용자가 보상받고, 진짜 커뮤니티가 인정받으며, 진짜 기여가 축적되는 생태계는 더 나은 알고리즘의 문제가 아니라, 더 나은 인프라의 문제다. 그리고 그 인프라의 설계가 지금 시작되고 있다.